아침 식사가 헌신에 대한 비유로 사용된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아마 꽤 오랜 기간 동안 교회에 다닌 사람일 것이다. 분명 우리 설교자들이 좋아하는 이야기인 것 같다. 이런 식의 이야기다.
아침 식사를 제공함에 있어서 닭은 참여합니다(involved).
하지만 돼지는 헌신합니다(committed).
닭에게 아침 식사를 위한 달걀을 만드는 것은 끔찍하리만치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베이컨은 다릅니다. 돼지는 닭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헌신에 대한 이야기
나는 계속해서 헌신에 관해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대신 당신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하나 하려 한다.
나오미라는 여성은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외국으로 이주했다. 안타깝게도 남편이 이국땅에서 죽고, 나오미와 두 아들은 근근이 살아갔다. 아들들이 장성하여 오르바와 룻이라는 그곳의 여성들을 만나 결혼했다. 오프라(Oprah)가 아니라 오르바(Orpha)다. 오프라 윈프리의 원래 이름이 오르바였는데 출생 증명서를 작성하던 직원의 실수로 r과 p가 뒤바뀌면서 오프라가 되었다는 것을 어딘 가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실화일까? 그렇게 믿고 싶다…
나오미가 이주한 지 10년 뒤, 또 다른 비극이 그녀에게 닥친다. 두 아들마저 죽으며 나오미는 (과부인 것에 더해) 자식이 없는 상황이 되고 미망인이 된 두 며느리와 남게 된다.
상심한 나오미는 귀국하기로 한다. 이 외국 땅에는 그녀에게 남겨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다시 혼인하고 아이를 낳으라고 말한다. 하지만 오르바와 룻은 시어머니께 끝까지 충성하길 원하면서 떠나기를 거부한다.
“내 딸들아 돌아가라,” 나오미가 강권한다.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분명 이상한 말이지만, 이 당시에는 그것이 관례였다. 남편이 죽을 경우, 남편의 다른 형제가 미망인을 아내로 맞았다. 새로 남편이 된 도련님이 죽는 경우, 그다음 동생이 미망인을 그의 배우자로 삼는 식이었다.
기본적으로 나오미는 “나한테는 너희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면서 앞길이 창창한 젊은 며느리들을 풀어주는 한편 그녀의 짐, 심적 고통, 아픔을 스스로 감당하게 놔두라고 하고 있었다.
이에 오르바는 마음을 돌려 나오미에게 작별의 입맞춤을 했고, 룻은 끝까지 남았다.
나오미는 룻에게도 떠나라고 했다. 이 장면은 흡사 자신의 개를 보내려 하는 사람을 묘사한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내가 너 정말 사랑하는 거 알지, 스파키?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낸 우리지만, 상황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 글쎄, 더 이상 너를 돌보지 못할 것 같아. 네가 원래 살던 숲으로 돌아가게 해 줘야 할 것 같아. 이봐, 지금이야!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마! 나랑 같이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리 둘 다 알고 있어. 그러니 어서 가! 가 버려! 떠나라고! 바보야 너를 위해서라고! 내 말 안 들려? 어서 가! 사라지라고! 그거 알아? 너를 더 이상 원치 않는다고! 그러니 가 버려! 떠나라고! 너도 내가 싫잖아! 나도 널 원치 않아! 어서 가! 가라고!
미안하다. 너무 몰입했다.
하지만 룻은 떠나지 않았다. 룻이 떠나야 한다고 했던 나오미의 고집보다 반드시 어머니 곁에 남겠다고 했던 룻의 고집이 더 강했다.
룻이 대답한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그녀를 향한 룻의 헌신에 나오미는 생각을 돌이킨다. 룻의 말은 종종 결혼식에 쓰인다. 물론 이 말은 사랑의 서약 그 이상이다. 이는 끈질기고 희생적인 헌신에 대한 약속이다.
룻이 집으로 돌아간다 해도 아무도 뭐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룻은 나오미의 짐을 전부 들쳐 메고는, “제가 어머니와 함께 할 거예요. 끝까지요”라고 말한 셈이다.
룻에게는 엄청난 희생이다. 그녀는 나그네와 과부가 멸시와 천대를 받는 땅으로 가야 했다. 룻은 둘 다에 해당하였다.
분명 가난한 삶이 될 것이다. 나오미도 룻도 부양해 줄 남편이 없었기 때문이다. 룻이 결혼할 수 있는 가능성도 아무리 좋게 봐야 불확실했다. 과부인데다가 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또 그녀의 가족들을 다시 만날 기회는 영원히 없어진 것이라 봐도 무방했다.
룻은 이 길이 값비싼 대가를 감수해야 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불확실성과 미지의 것으로 가득 찬 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절대 쉽지 않은 길이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걱정, 염려, 손해, 두려움이 무엇이든 감수하고 나오미와 함께하는 사랑의 길을 걷고자 했다.
헌신이 요구하는 것
이 이야기를 다시 살펴보면서 헌신의 한 가지 요소가 의도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우리가 너무나 자주 루틴을 헌신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항상 어떤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일에 대한 우리의 헌신도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행위의 이면에 어떤 의도가 깔려있지 않다면, 그 일은 결국 루틴이 될 수밖에 없다. 아무 생각 없이 하는 일 말이다. 이것은 헌신이 아니다.
룻에게는 나오미를 향한 의도적 헌신이 있었다. 어떻게 나오미를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도적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전 십 년 동안 해왔던 것처럼 주일 아침에 예배에 참석하는 것과 어떤 식으로든 의도적으로 예배에 집중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이다.
-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할 것을 기대하는 일
- 의도적으로 예배 전에 처음 참석한 이들과 대화하는 일
- 의도적으로 예배 후 점심 식사에 누군가를 초대하는 일
- 의도적으로 내가 만나는 누군가를 축복하는 일
의도성 없는 우리의 노력은 루틴이 되고, 루틴은 꼭 헌신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도성 없는 루틴은 기껏해야 참여하게 만든다. 마치 치킨과 달걀이 아침 식사에 참여하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우리가 헌신하고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의도적으로 행동하고 사랑할 때, 이는 우리가 하는 일에 헌신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마치 돼지가 우리의 베이컨/달걀 아침 식사에 베이컨을 공급하는 일에 헌신적인 것처럼 말이다.
조셉 유는 서부 해안 출신으로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아내와 아들과 함께 만족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는 휴스턴의 모자이크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의 블로그 josephyoo.com에서 그가 쓴 더 많은 글을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