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호흡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담겨 있습니다. 브라이언 틸먼 목사는 우리가 들이마시는 숨 속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부정의란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는 이들을 학대하는 것임을 또한 일깨워줍니다. 사람들이 정의를 위해 일어서서 하나님의 이름을 들이마시고 내쉰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해 보세요. 영적 실천 방법과 정의를 위해 일어서는 일에 관한 더 많은 정보를 www.umc.org/ko/rethinkchurch 에서 확인하세요.
발표자: 브라이언 틸먼 목사
촬영/편집: 조셉 맥브레이어 목사 (더 많은 자료: https://www.youtube.com/channel/UCVik91pJZQzoUeZEgwe95Tg)
비디오 발표 원고
저를 따라 해 보세요. 지금 하는 다른 일을 멈추세요. 눈을 감으시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세요. 한 번 더 해봅시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세요…
자 눈은 그대로 감고 계세요. 그리고 글 읽기를 처음 배웠던 때를 떠올려 보세요. 가장 처음 배운 것은 아마 ABC였을 것입니다.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T, U, V, W, X, Y, Z
기억하시나요? 그 시절에 관한 긍정적인 기억을 갖고 계셨으면 좋겠네요. 누가 알파벳을 가르쳐 주셨는지 혹시 기억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부모님이거나, 친척이었거나, 선생님이었겠지요.
알파벳을 배운 뒤에는 아마 알파벳을 쓰는 방법과 각 글자가 어떤 소리를 내는지 배우셨을 겁니다. 그러고 나서 그중에 어떤 것이 자음이고 어떤 것이 모음인지 배우셨을 겁니다. A, E, I, O, U에 어쩌다 Y 정도만 모음이란 것을 모두 기억하실 겁니다. 하지만 자음과 모음의 공식적 정의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모음이란?
대학 시절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저는 모어하우스(Morehouse) 대학교에 재학 중이었지만 한 과목을 스펠만 칼리지(Spelman College)에서 들어야 했습니다. 저는 이 수업에 관해 큰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스펠만이 여학생들만 다니는 학교였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니라 선생님 때문이었습니다. 그 수업을 진행하셨던 크리스티 킹 패리스 박사님은 스펠만 칼리지의 존경받는 교육학 교수님으로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친누님이기도 했습니다.
패리스 교수님은 아이들에게 읽기를 가르치기 위해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자음과 모음의 명확한 정의와 읽기에 관한 복잡한 세부사항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자음은 숨이 부분적으로라도 차단되는 음성입니다.
모음은 매우 다릅니다. 모음은 성대가 비교적 개방된 채로, 성대의 진동은 있지만 가청 마찰은 없는 상태에서 생성되는 소리체계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모음이란 차단 없이 숨이 입으로 나가는 상태에서 만들어지는 글자 소리입니다.
영어에서 숨이 차단되지 않고 발음되는 모음들은 A, E, I, O, U이며 때로는 Y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이야기했습니다.
YHVH
지금까지는 영어에 관한 것이었고, 이제 히브리어에 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이 언어는 자음으로만 구성됩니다. 그래서 토라의 가장 오래된 사본에는 모음이 아예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 점과 가로 작대기처럼 생긴 모음들이 자음 아래에 추가되었습니다. 모음이 붙지 않은 단 한 단어가 있었는데… 그 단 하나뿐인 예외가 바로 하나님의 공식 이름이었습니다.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요드(י), 해이(ה), 바브(ו), 해이(ה)로 쓰고 일반적으로 야웨라고 발음되는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고자 할 때였습니다. 야웨(יהוה). (영어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지만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읽습니다)
영어로 표기하면 YHWH 정도가 될 것입니다. 요드(י)는 영어의 Y와 비슷합니다. 해이(ה)는 H와 비슷하고, Vav(ו)는 영어의 V나 W에 해당합니다. 요드 해이 바브 해이.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너무나 신성시했기 때문에 실수로라도 철자나 발음을 틀리는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 하나님의 이름에는 모음이 붙지 않았고, 소리 내 그 이름을 읽을 때도 감히 발음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이름을 “주님”이라는 뜻의 아도나이(אדוני)라는 단어로 바꾸어 읽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텍스트에 쓰인 요드(י), 해이(ה), 바브(ו), 해이(ה)를 볼 때마다 자동으로 아도나이라고 읽습니다. 구약성경의 영어 번역에서는 하나님의 신성한 이름 יהוה가 등장하는 곳에서 LORD라고 모두 대문자로만 표기된 단어를 보게 됩니다.
에스겔 37:1-6을 요드 해이 바브 해이를 다시 집어넣어서 읽으면 이렇게 됩니다(하나님의 이름을 발음하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 알파벳을 넣어 읽을 것입니다)
1 요드 해이 바브 해이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요드 해이 바브 해이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요드 해이 바브 해이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요드 해이 바브 해이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5 요드 해이 바브 해이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요드 해이 바브 해이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하나님의 이름 말하기
성경의 에스겔 예언자는 그 백성의 절망을 상징하는 마른 뼈들이 가득한 골짜기에 서 있습니다. 시신들은 뼈만 남을 때까지 분해되었고 부활이나 생명에 대한 희망이 없는 것만 같았습니다.
에스겔이 기록된 시기는 유대 민족에게 큰 어려움의 시기였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에 의해 정복되었고, 그 기간 중 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죽음을 면했던 이들은 바벨론이 원하고 요구했던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이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가 유배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남았던 이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두려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예루살렘 도성과 성전이 파괴되는 것을 목격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로 백성들은 이전처럼 예배할 수 없었습니다. 익숙한 것은 다 사라졌거나 바뀌었습니다.
우리 또한 그런 시대를 살고 있지 않습니까? 예배로 함께 모이지 못하리라고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혹은 식탁에 함께 모여 식사하거나 특별한 날을 함께 축하하지 못하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실지 모르지만, 저는 그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교우들과 함께 예배하고, 함께 식사하고, 축하했던 시간이 그립습니다. 우리가 그곳에 있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셨던 그 시기에 유대 백성이 겪었던 것과 조금이나마 비슷합니다.
에스겔과 그 백성들은 낙담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들의 미래와 다음 세대의 미래에 대해 그들은 염려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이유때문에 에스겔을 이 계곡으로 데려오셨습니다: 비록 상황이 나빠 보이고, 나쁘게 느껴지고, 실제로 좋지 않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치유하고 구원하고 회복하지 못할 것은 없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것을 보여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יהוה라는 이름이 얼마나 특별한지 에스겔에게 보여주려 하셨습니다.
יהוה 하나님은 마른 뼈들에 하나님의 숨결을 불어 넣으시고 그들이 살게 하셨습니다.
호흡이 없이 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יהוה에는 4개의 자음뿐이지만 이들은 마치 모음이 발음될 때와 유사하게 기능한다는 점입니다.
랍 벨(Rob Bell)의 누마(Nooma)라 불리는 연구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고대 랍비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모음들이 모여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모음은 음절이 여러 개인 단어나 이름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의 소리는 오직 숨 쉬는 소리로만 묘사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יהוה.
야-웨
야-웨
야-웨
즉 숨 쉬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함께 계시고 하나님은 저와 함께 계십니다. 그보다 훨씬 좋은 것이 여기 있습니다.
יהוה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는 몸에 생명을 주고 산소를 심장에 공급한 뒤 동맥을 통해 몸의 나머지 부분으로 운반하는 폐에 바로 יהוה를 들이마십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 몸은 그저 자기가 알아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몸으로 들어가는 하나님의 이름 바로 이것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יהוה
YHVH가 우리 안에 계시다
생각해 보세요… 생명을 가진 누구나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숨 쉬는 것입니다…
혹은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는 것인가요? יהוה
더 이상 숨 쉴 수 없을 때 죽지 않습니까? …
혹은 하나님의 이름을 더 이상 말할 수 없게 될 때라고 해야 할까요? יהו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은 채, “하나님은 없다"라고 말하는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해 봅시다. 사실은 매 호흡마다 יהו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내버려 두신 채 힘든 도전이나 시련을 겪게 하셨다고 생각하는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해 봅시다. 사실 하나님은 그들 안에 드나들며 생명을 주고 계시고, 단 한 번도 그들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여전히 יהוה 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슬픔에 잠긴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해 봅시다. 괜찮은지 살피는 친구의 전화에는 괜찮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상실로 인해 공허한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위로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가 יהוה 라고 숨 쉬는 중에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 중에 말입니다.
대단히 충격적이고 심각한 일을 겪고 있는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해 봅시다.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아 “그만해!”라고 소리 지르거나 도와달라고 울부짖을 수조차 없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יהוה를 호흡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들이마시는 숨 안에 계시고 우리가 호흡하는 그 숨이 능력과 함께 온다는 이 사실이 여러분에게 좋은 소식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간을 내어 YHVH하세요
그렇다면 יהוה 를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우연이 아니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숨결이 있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를 안다는 것은 우리가 사는 방식과 우리가 사는 이유를 변화시킵니다. 이는 우리가 자매와 형제를 대하는 방식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는 이들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는 누군가가 학대를 당할 때 곁에 서서 그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전까지, 이 나라에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전까지 우리는 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거나 우리를 회복하실 수 없다고 느끼지 못하도록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혼자 걷고, 혼자 살고, 혼자 격리해야 할지라도, יהוה는 우리가 숨 쉬는 모든 순간에 우리 안에 계십니다.
혼자 있을 때도 우리의 숨에 능력이 있습니다. 하물며 사람들이 정의와 공의를 위해 일어서서 함께 하나님의 이름을 호흡할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생각해 보십시오.
יהוה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지한 채로, 함께 행진하고, 함께 줄을 서고, 함께 투표하는 사람들의 힘을 상상해 보십시오. 마른 뼈들이 가득한 골짜기에서 에스겔과 함께 계셨고, 마른 뼈들에 들어가 살, 피부, 숨을 갖게 하셨던 יהוה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신 יהוה이십니다.
마리아 안에 계셔서 구원자를 품게 하셨던 יהוה가 지금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의 할머니들은 백인 가정에서 청소하고, 식사를 준비하고, 옷을 짓고, 편견을 견뎌내고 그래서 우리 부모님과 우리가 더 나은 세상에 살 기회를 얻게 해주셨습니다. 동일한 יהוה가 바로 그들 안에 있었고, 여러분과 제 안에 계십니다.
상상할 수조차 없는 아픔과 고통, 비인격적 대우와 모든 농장에서 트럼프보다 훨씬 나쁜 이들을 견뎌냈던 우리 조상들의 숨 속에 계셨던 같은 יהוה 가 지금 우리 안에 계신 같은 יהוה 이십니다.
그러니 절대로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이 상황을 이겨낼 수 없다고 절대로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고 생각하지도 마시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도 마세요.
심지어 우리가 이 나라에서 정의를 누릴 가치가 없는 이들이라 여겨지더라도.
심지어 백인 자경단원들이 AR15 소총을 메고 다니며 평화로운 시위대를 위협할 때에도.
심지어 소위 법의 집행자(역자 주: 경찰관)라 불리는 이들에 의해 무고한 흑인 여성과 남성들이 무참히 죽임을 당하는 때에도.
심지어 대배심원들이 벽(walls)에는 시민권을 부여하면서, 흑인 여성의 시민권은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도. 그녀가 저지른 유일한 범죄는, 이 나라가 법률에 명시한, 흑인으로 태어난 것뿐이었습니다.
심지어 이 나라의 정치 체계가 남북전쟁 이래로 볼 수 없었던 나락으로 떨어지는 상황에도.
심지어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경을 헤매거나 죽더라도…
심지어 이 모든 이들이 우리의 호흡을 앗아가려 하는 그 순간들에도…
우리가 잠시 시간을 낼 수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숨 쉴 때 단지 산소를 들이마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산소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숨 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 안에, 우리를 위해, 우리를 통해 어떤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내어드릴 수만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일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50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יהוה를 찬양할지어다
그래서 너를 치려고 제조된 모든 연장이 쓸모가 없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뒤에도, 우리는 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목소리를 높여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신다면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이 누구든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