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시스 번스 목사는 흑인으로서 미감리교회의 첫 번째 감독이 된 인물이다. 1858년에 감독 성임을 받은 그는 라이베리아의 선교 감독으로 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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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번스 목사가 목회자가 되고 이후 감독이 된 것은 당시의 미국 내 인종차별, 식민주의, 및 제국주의에 반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래 자료들을 통해 당시 상황에 대해 더 알아보세요.
그는 유년 시절을 뉴욕주의 그린 카운티에서 보냈다. 가난한 가정 출신이었던 그는 4살에 한 농부의 농업 노동자(indentured)가 되었고 8세에는 앳우드 가문(Atwood family)의 농장으로 옮겨 일하기 시작했다. 한 감리교회에서 주일 성경 공부 지도자로 섬겼던 앳우드 여사는 농한기였던 겨울에는 프랜시스가 그녀의 자녀들과 함께 학교에 다닐 수 있게 허락해 주었다.
프랜시스는 15세에 미감리교회 교인으로 가입했고, 17세에는 설교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농업 노동자였던 그의 신분은 설교자의 소명에 커다란 장애물이었다. 그는 21세까지 농업 노동자로 계약되어 있었다.
노동자 계약이 끝난 후, 프랜시스는 교사로 일하면서 캐스킬 허드슨 지방(Catskill Hudson District)에서 설교자 인허를 받았다. 많은 이들이 그의 설교 실력에 주목했고 선교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도록 격려했다. 기회는 1834년에 찾아왔다. 라이베리아로 떠났던 존 세이즈 목사와 동행하게 된 것이었다.
10년 동안 라이베리아에서 선교사, 교사, 지도자로 섬긴 그는 뉴욕으로 돌아와 에드먼드 제인스 감독에게 안수를 받았다. 다시 라이베리아로 돌아온 번스 목사는 모라비아 신학교에서 가르쳤고, 1845년에는 세이스 목사에 이어 라이베리아 선교사회의 계간지 아프리카 루미나리(Africa’s Luminary)의 편집자가 되었다. 번스 목사는 또한 이 기간에 라이베리아연회 대표(president)로 섬겼다.
1856년 총회는 아프리카에 파송할 선교 감독의 선출을 승인했고, 라이베리아연회는 1858년 번스 목사를 초대 감독으로 추대했다. 이 결정이 감리교 역사에 갖는 중요성, 특히 라이베리아 감리교회에 갖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는 당시 “아프리카 열병(the African fever — 말라리아로 추정된다)”으로 불리던 질병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하였고, 결국 1863년 겨울,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귀국한 지 사흘 만에 또 노예해방선언에 서명한 지 3개월 만에 서거했다. 그의 유해는 라이베리아로 돌아가 그곳에 묻혔다.
번스 감독에 의해 시작되거나 조직되고 계속되었던 감리교의 라이베리아 내 사역들은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다양한 형태로 꽃을 피우고 있다. 라이베리아는 30만 명에 이르는 연합감리교인들이 있고, 연합감리교회는 라이베리아의 가장 큰 교단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두 명의 대통령(엘렌 존슨 서리프, 2006-18, 조지 웨아 2018-현재)을 배출하며 대중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라이베리아의 연합감리교회는 20개 지방 및 다양한 선교 사업 등을 펼치는 하나의 연회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이 벌이는 선교사업에는 농업개발, 건강(보건소 및 병원), 교육(유치원-대학) 등이 있다.
본 자료는 연합감리교 공보부의 사역인 Ask The UMC에 의해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