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의 달 및 여성의 달을 기념하면서, 연합감리교회에 물어보세요(Ask The UMC)는 2회에 걸쳐 미국 감리교 역사에 선구자적 신기원을 이룬 흑인 여성 지도자 네 명의 이야기를 연재할 예정이다.
1부는 아이다 벨 웰스-바넷과 매리 매크로드 베툰의 이야기를, 2부는 샐리 크렌쇼 목사와 리온틴 T.C. 켈리 감독의 이야기를 다룬다.
아이다 벨 웰스 바넷 (Ida Bell Wells-Barnett, 1862-1931)
사진: 아이다 B. 웰스-바넷의 초상, 1893년경. 미 여성 사진작가인 샐리 개리티에 의해 알부민은 방식으로 제작.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국립 초상 갤러리.
아이다 벨 웰스는 미 남북전쟁 중 미시시피주 할리 스프링스에서 노예로 태어났다. 그녀는 후일 선구자적 언론인, 린치 반대 운동가, 참정권 확장을 주장하고 여성과 유색인종을 위해 일하는 정의의 십자군이 된다.
노예해방선언 이후 그녀의 부모들은 역사적 흑인 대학 중 가장 오래된 대학인 러스트 칼리지(Rust College)를 설립한 감리교 감독교회(Methodist Episcopal Church)의 한 기관이었던 해방 노예 지원회(Freedmen’s Aid Society)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아이다는 러스트 칼리지에서 고등 교육을 시작했지만, 1878년 황열병 사태로 부모님과 동생을 여읜 뒤 동생들을 부양하기 위해 학업을 포기하고 교사로 취직하게 된다.
남부 지역 재건이 가져왔던 변화 중 한 가지는 대중교통을 포함한 모든 공공시설의 통합이었다. 물론 모든 운송 회사가 이 조치를 따랐던 것은 아니다. 1884년 아이다는 멤피스로 향하는 기차의 “여성 칸"에 앉아 여행하던 중 흡연 칸으로 자리를 옮기라는 요구를 받는다. 돈을 내고 표를 구입했음에도, 백인 여성 한 명을 여성 칸에 수용하기 위해 내려진 조치였다. 그녀는 거절했고, 승무원이 강제로 그녀를 끌어내는 과정에서 그를 물어, 결국 기차에서 강제로 추방되었다. 아이다는 해당 철도 회사를 고소했고, 1심의 승리는 결국 테네시주 대법원에서 번복되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헤드라인을 장식했고 이는 그녀가 언론인으로서의 길을 걷는 발판이 된다. 철도 회사를 고소했던 25세의 학교 교사는 이 일을 계기로 인기 작가 반열에 올라선다.
1889년 그녀는 멤피스 지역의 흑인 및 기독교인들 사이에 널리 유통되었던 신문인 프리 스피치(Free Speech)와 헤드라이트(Headlight) 지의 기고 작가로 활동했다. 이 일은 그녀가 새로운 분야의 직업을 모색하게 했으니, 조사 및 고발과 더불어 남부에서 여전히 이뤄지던 린치를 종식하기 위한 십자군이 되는 일이었다. 멤피스에서 그녀의 친구 셋이 린치에 의해 숨진 뒤, 웰스 바넷은 “남부의 공포: 단계별 린치 법칙"이라는, 아마도 그녀의 작품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평가되는 글을 남긴다.
린치에 대한 그녀의 거침 없는 비판은 1892년 그녀가 멤피스를 떠나 덜 위험한 시카고로 본거지를 옮기게 했다. 그곳에서 제인 애덤스와 함께 시카고 지역 공립학교의 인종차별을 막는 일을 위해 일했으며, 여성의 참정권을 위한 투쟁의 가장 노련한 인물 중 하나로 활약했다. 1913년 워싱턴에서 열린 여성참정권을 위한 기념비적 행진 행사에서 그녀의 동료 활동가들은 웰스-바넷이 행진에 참여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백인들의 지지를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폭도들이 행진로를 막고 여성 참가자들을 때리기 시작했을 때, 웰스-바넷은 혼란한 상황 중에도 그녀의 동료 참정권 운동가들 대열에 다시 합류했다.
이후 여생 동안 시카고에 거주했지만, 그녀는 전국적으로 큰 인기를 누리며 강연자와 멘토로서 또한 참정권 확대, 민권 확대, 반 린치 운동의 조직자로서 활동했다. 그녀는 또한 전국적 흑인 민권 옹호 단체인 NAACP를 설립했던 두 흑인 여성 중 한 명이었다. 물론 많은 이들이 그녀의 급진성을 이유로 단체의 지도자로 활동하기에는 부적합하다고 생각했음에도 말이다. 1931년 사망할 때까지 그녀는 시카고의 도시 개혁을 위해 활발히 활동했다.
매리 매크로드 베툰 (Mary McLeod Bethune, 1875-1955)
사진: 매리 매크로드 베툰의 초상, 플로리다주 데이토나 비치, 1915년경. 사진 출처: 플로리다 메모리, 플로리다주 주립 기록 보관소.
매리 매크로드 베툰은 20세기를 대표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교육자, 지도자, 정부 관료, 및 인권 운동가였다.
그녀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해방 노예 가정의 1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스코샤 신학교(Scotia Seminary)와 무디 선교 학교(Moody Institute for Home and Foreign Missions)에서 수학한 매크로드는 원래 선교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그녀를 파송하고자 하는 기관이나 교회를 찾을 수 없었고 대신 교육 사업과 학교 교육에 집중하게 된다. 동료 교사였던 알버타스 베툰과 이 시기에 결혼한다.
남편과 사별 후, 매크로드 베툰은 플로리다주 데이토나에서 여학생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이후 1931년 쿡맨 학교와 합쳐져 베툰-쿡맨 대학교가 된다. 이 학교가 제공했던 양질의 교육은 매크로드 베툰의 권익 옹호 활동 및 청소년 조직 리더십과 더불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관심을 끌었다. 베툰은 1936년 국립 청소년부(National Youth Administration) 흑인 사무국 국장으로 임명되었고 1944년까지 재직했다.
교육 분야에 남긴 그녀의 공헌 외에도, 매크로드 베툰은 민권 확장을 위해 적극적 캠페인을 벌였으며 차별과 린치를 종식하기 위해 싸웠다.
공무원으로 재직 중이었던 1940년 그녀는 NAACP의 부대표가 되었고 1955년 사망하기까지 계속 부대표로 일했다. 1942년 육군 여군단의 흑백 통합을 감독했으며, 1945년 트루먼 대통령의 지명으로 국제연합(UN)의 창설식에 참석한 유일한 흑인 여성이었다. 이외에도 그녀는 숙박 및 보험 분야의 성공적인 사업가이기도 했다.
감리교 지도자로서 그녀는 중앙 지역 총회의 인종 분리 철폐를 주장하면서, 평신도 대표로 총회에 4회 참여하기도 했다.
시리즈 보기
본 자료는 연합감리교 공보부의 사역인 연합감리교회에 물어보세요(Ask The UMC)에 의해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