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대함이 역설이 될 때: 홈디포 직원의 비유

포도원 품꾼 비유는 하나님의 관대함을 드러낸다.
포도원 품꾼 비유는 하나님의 관대함을 드러낸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0장에서 한 농장주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자신의 농장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하기 위해 새벽녘에 홈디포 주차장으로 나갔던 사람이었다. 하루 일당 400달러에 동의한 노동자들은 농장주의 픽업트럭 뒤에 올라타고 일과를 시작했다(우리 시대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일부 세부 사항을 약간 변경할 수도 있다).

첫 번째 그룹이 일에 매진하고 있을 때, 지주는 오전 9시경 집 근처 홈디포에 다시 나가서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더 찾았다. 임금을 합의한 후 새로운 일꾼들은 그들의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농장으로 향했다.

그 후 정오와 오후 3시에 농장주는 같은 방법으로 홈디포에서 일할 사람을 데려왔다. 마침내 오후 5시에 그는 다시 홈디포 주차장으로 가서 아직 고용되지 않은 사람들을 보고 일자리를 제안했고 그들은 수락했다.

일과 후 일꾼은 임금을 받기 위해 줄을 섰다. 오후 5시에 고용된 그룹은 노동의 대가로 각각 400달러를 받았다. 새벽에 고용되었던 사람들은 흥분했다.

“저 사람들은 한 시간 일하고 400달러를 받았는데 우리는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다가온 농장주는 그들에게 400달러씩을 주었다. 

너무나 불공평한 처사였기에 그들은 이 월급에 대해 기뻐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한 명이 말했다: “이봐요, 이건 정말 불공평해요. 우리는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죽도록 일했는데요. 그런데 뜨거운 햇볕을 피해 한 시간만 일한 친구들이 우리와 같은 금액을 받는다고요? 말이 되나요?”

“친구들,” 농장주가 대답했다. “나는 여러분에게 합의한 대로 돈을 지불했습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난 잘못한 것도 없고, 내 돈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데, 그것도 안 되나요? 아니면 관대함 때문에 화가 건가요?”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그 이야기를 끝내신다. 

정말 흥미로운 질문 아닌가: 관대함 때문에 화가난 건가요

누군가의 관대함에 분노해 본 적이 있는가? 

“아니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우리의 본능이다. 누가 관대한 사람에게 화를 내겠는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관대함에 분노했던 순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 베풀어진 관대함이 아니었다. 관대함이 우리에게 베풀어질 때 우리는 절대 원망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자격이 없거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관대함이 베풀어질 때는 어떤가? 그 관대함이 우리에게 잘못된 방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일부 사람들이 학자금 대출 탕감 이슈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했는지 생각해 보라. “나는 나 스스로 빚을 다 갚았으니 다른 사람들도 자기가 알아서 갚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또는 별로 실력이 없어 보이는 직장 동료가 당신이 그토록 원하던 승진을 한 경우에는 어떨까?

아니면 부모님께서 순진해 보이는 형제자매는 “아낌없이” 무조건 사랑하시면서 당신은 그냥... 거기서 거기인 듯 대우하실 때일 수도 있다. 

스스로 정직해져 보자. 우리는 하나님이 관대하기보다는 공평하기를 원한다. 아니면 적어도 우리에게 편파적이면서 공평하시기를 바란다.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공평한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으시다는 점은 사실은 불평하고 한탄하기보다는 감사해야 하는 점이다. 하나님이 실제로 공평하다면 우리는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평하지는 않지만, 관대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공평한 대신 관대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은혜와 사랑을 관대하게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우리에게 계속해서, 그리고 지속해서 보여 주신다. 우리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으시지만 관대하시기 때문에 두 번째 기회뿐만 아니라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그리고 계속된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관대한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관대함은 많은 경우 돈이나 재정에 국한되어 있는 것 같다. 물론 중요한 이야기이다. 물질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짜 놓은 예산은 실은 도덕적 문서다. 우리의 우선순위가 실제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우리의 관대함은 지갑 그 이상의 것까지 미쳐야 한다. 우리의 시간, 소유물, 또 우리의 목숨까지도 관대하게 드릴 수 있어야 한다. 관대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관대함으로 부르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은 우리도 모든 것을 그분께 드리라고 초대하신다. 

관대함을 지속해서 실천하는 방법은 감사를 잃지 않는 것이다. 감사가 관대함의 토대라는 점을 나는 분명히 확신한다. 우리 삶에 대해 감사하지 못할 때 우리는 관대함을 잃는다. 하지만 감사를 영구적인 태도로 만들 수 있다면, 이는 분명 우리 삶의 모든 면에서 관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기억하라. 우리는 푸른 지구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의 것이란 없다. 우리에게 잠시 맡겨주신 것들일 뿐이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모든 것을 계속해서 신실하게 관리하라. 감사를 잃지 않으면서 맡겨주신 것들에 관대한 사람들이 되길 소망한다. 


조셉 유는 When the Saints Go Flying in(성도가 날아들 ) 저자입니다. 그는 서부 해안 출신으로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아내와 아들과 함께 만족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는 휴스턴의 모자이크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의 블로그 josephyoo.com에서 그가 많은 글을 만나보세요.

연합감리교회 공보부(United Methodist Communications)는 연합감리교회의 기관입니다.

©2025 연합감리교회 커뮤니케이션부. 판권 소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