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친절한 분이셨는가? 불편한 진실 발견하기

예수님은 항상 친절한 분이셨는가? 아마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분은 선한 분이셨다.
예수님은 항상 친절한 분이셨는가? 아마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분은 선한 분이셨다.

“예수님은 친절하지(nice) 않았다”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생각하는가? 동의하는가, 아니면 동의하지 않는가? 그 말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을 달라지게 하는가?

내가 예수님에 대해 가장 먼저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주일학교 교사, 중고등부 목사님과 지도자, 목사님들이 예수님에 대해 말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친절하지 않으셨다는 것이었다.

마태복음 23장을 읽고 이것이 “친절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인지 생각해 보자.

몇 가지 주목해야 할 부분을 짚어보자:

눈먼 안내자들아! 개미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켜버렸구나.

율법 교사들과 바리새인들 너희는 얼마나 끔찍한가! 위선자들! 너희는 하얗게 칠한 무덤과 같다.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안에는 죽은 뼈와 온갖 오물이 가득하다. 너희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의롭게 보인다. 그러나 내면은 가식과 반항심으로 가득 있다.

뱀들아! 뱀의 자식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심판을 피할 있겠느냐?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할 수 있는 친절한말은 아니었다.

나는 우리가 예수님은 “친절한” 분이셨고 우리의 소명은 그분을 따라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온갖 종류의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오해하지 마시라. 나는 예수님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독자들이 친절함을 버리고 완전히 멍청한 사람이 되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친절한(nice) 것과 선한(good) 것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선하셨지, 친절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친절함이 아니라 선함에 집중해야 한다.

이 둘의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친절한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친절한 사람과 선한 사람

친절하다는 것은 선해지는 것의 방해 요소가 될 수 있다.

“친절한” 사람들은 실제 악에 맞서지 않는다. 그들은 예의와 품위를 지키는 데 너무 신경을 쓴다. 그들은 누군가에게 훼방 거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선한 사람들은 불의와 악에 맞서며 종종 “친절한”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친절한” 사람들은 현재의 질서(status quo)에 도전하지 않는다. 현재의 질서에 도전하며 혼란을 야기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거나 친절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오히려 현상 유지를 선호한다.

선한 사람들은 (이사야 43장을 인용하여) 고르지 않은 땅이 평평해질 있도록 현상 유지에 도전한다.

유명한 설교자 토니 캄폴로는 교회 모임에서 한 설교에서 이 불균형을 지적한 적이 있다(내 의역임을 밝혀둔다):

지금, 순간에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모인 사람 놈도 그들에 대해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은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보다 제가 말에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은혜로 관대하셨기 때문에 당국자들로부터 버림받으셨다. 예수님은 포용적이셨고, 경계를 확장하기 위해 애쓰시다가 권력자들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었다.

예수님이 “친절한” 사람이었다면 억압적이고 약자를 소외시키는 체제에 도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이 “친절했다면” 그는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선하셨다. 그의 사명은 하나님 나라의 선함을 나누는 것이었지,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 나라의 선은 세상의 가치와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은 권력자들의 기분을 상하게 할 위험을 무릅쓰고 복음을 선포하는 데 주저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권력을 향해 진실을 말씀하셨고, 종교 제도에서 배제된 사람들을 포용하기 위해 문을 여셨다. 그리고 그 대가로 목숨을 잃으셨다.

이미 두 번 말했지만 다시 한번 언급할 가치가 있다: “친절한” 사람이었다면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까?

선함에 집중하기

글쎄. 친절하고, 예의 바르고, 예쁘게 보이는 에 너무 집중하지 말자. 오해하지 마시라. 이렇게 행동해야 하는 때와 장소가 분명 있다. 밖에 나가서 완전히 바보가 되라는 말도 아니다. 하지만, 친절해지는 데 모든 초점을 맞추면, 좋은 사람이 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선해지는 데 집중하자.

선함은 우리가 더 포용적이게 하고, 현상 유지에 도전하고, 모든 사람, 특히 취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게 한다.

선은 권력에 맞서 진실을 말하고, 불의를 지적하고, 온전함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선한 이들은 하나님과 협력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더 가까이 앞당길 수 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때, 선함을 위해 거룩한 분노를 표출하고 불의에 빛을 비추는 것도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선한 행동에는 종종 희생이 필요하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친절하기만 하다고 해서 열리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친절한 그리스도인이 너무 많다. 더 많은 선한 그리스도인이 필요하다.


조셉 유는 When the Saints Go Flying in(성도가 날아들 ) 저자입니다. 그는 서부 해안 출신으로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아내와 아들과 함께 만족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는 휴스턴의 모자이크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의 블로그 josephyoo.com에서 그가 많은 글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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