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의 숨은 영웅들: 마틴 보엠

마틴 보엠(Martin Boehm)은 자신의 농장에서 기도하던 중 뜨거운 믿음의 체험을 했다. 사진 제공: 교회역사보존위원회.
마틴 보엠(Martin Boehm)은 자신의 농장에서 기도하던 중 뜨거운 믿음의 체험을 했다. 사진 제공: 교회역사보존위원회.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라는 이름을 모르는 이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감리교 역사에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중요한 이름들도 많다. 감리교의 숨은 영웅들 시리즈는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지만, 그들의 삶과 증거가 오늘의 연합감리교회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글은 연합감리교회의 전신 교단 중 하나인 복음주의연합형제교회(EUB)의 창립 인물에 관한 연재 기사 중 하나다. 여기에서 복음주의연합형제교회와 그 독특한 역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많은 영웅을 만나보라

감리교회의 알려지지 않은 영웅들 시리즈 페이지를 살펴보고 더 많은 감리교인들에 관해 알아보라.

모든 것은 헛간에서 시작되었다. 독일계 미국인 필립 윌리엄 오터바인(Philip William Otterbein) 목사는 펜실베이니아주 랭커스터 외곽의 롱스반교회의 예배에 참석했다. 예배 중 설교자의 설교에 감동하여 그에게 다가가 포옹하면서 독일어로 “우리는 형제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설교자는 스위스계 독일인 출신으로 지역 메노나이트 교회의 감독이었던 마틴 보엠(Martin Boehm)이었다. 그는 이후 오터바인과 함께 연합감리교회의 전신 교단인 그리스도연합형제교회를 설립한다.[1]

1725년 랭커스터에서 독일 이민자 가정에 태어난 보엠은 16세기 종교개혁자 멘노 시몬스(Menno Simons)의 가르침을 따르는 재세례 파공동체의 일원이었다.[2] 당시 메노나이트는 급진적이라고 여겨지는 여러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엄격한 평화주의자이면서 선서를 거부했으며, 성인에게만 세례를 주었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서로의 발을 씻기는 등 고대 기독교 관습을 많이 행했다.[3] 보엠은 신학교에 다니거나 목사가 되기 위한 정식 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대신 공동체라는 현장에서 모든 것을 체득했다. [4]

보엠은 1753년 이브라는 메노나이트 여성과 결혼하여 8명의 자녀를 낳았다. 보엠은 처음에는 설교자의 소명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젊은 시절의 존 웨슬리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농장에서 일하던 중 자신만의 올더스게이트 체험을 했다. 그는 훗날 “기쁨의 물줄기가 내게 부어졌다.”고 고백하기도 했다.[5]

메노나이트 목회자들이 다른 지역에 가서 설교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지만, 보엠의 분명한 체험과 설득력 있는 그의 설교는 종종그 지역의 다른 메노나이트 공동체에서 나눠지기도 했다. 1761년에 감독이 된 그는 몇 년 후 오터바인과 운명적 첫 만남을 가졌고, 이 만남은 평생의 우정을 시작하는 동시에, 1800년 그리스도연합형제교회를 창립하는 초석이 되었다.[6]

보엠은 또한 당시 미국 식민지에서 새롭게 부상하고 있던 감리교라는 기독교 운동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보엠은 오터바인처럼 감리교인들 또한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감리교인들이 지역 신도회를 조직하는 방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1775년 보엠은 자기 집에 감리교 속회 모임 장소로 제공하는 대담한 조치를 취했다. 후일 이 속회가 성장하고 번영하여 결국 랭커스터에 최초의 감리교회인 보엠교회(Boehm’s Chapel)가 되었다. 보엠의 가족이 기증한 땅에 세워진 이 교회는 오늘도 여전히 존재한다.[7]

오터바인과 감리교인 등 메노나이트 공동체 바깥의 이들과 협력하려 했던 보엠의 의지는 안타깝게도 그의 공동체 내에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1777년 메노나이트 공동체에서 파문당했으며, 이러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사역을 계속 이어갔다. 2016년 랭커스터 메노나이트연회는 사후에 보엠을 감독으로 복권하기로 결정했다. [8]

감독직에서 해임된 이후, 보엠은 1800년 오터바인과 함께 미국 내 독일어 사용자들을 위한 독립적 교회 운동인 그리스도연합형제교회를 창설했다. 두 사람은 모두 새 교단의 초대 감독으로 봉직했다.[9]

마틴의 아들 헨리 보엠은 아버지를 따라 목회 사역을 감당했다. 어렸을 때부터 보엠의 집에서 모였던 감리교 모임에 참석했던 그는 미감리교회(Methodist Episcopal Church)의 순회 설교자가 되었다. 프란시스 애즈베리 감독의 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헨리는 두 사람이 종종 함께 여행할 때 애즈베리 감독을 위해 독일어권 감리교인들을 위한 통역사로 섬기기도 했다.[10]

마틴 보엠은 1812년 3월 23일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애즈베리 감독이 그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전하기도 했다.[11] 그와 오터바인이 함께 시작한 그리스도연합형제교회는 그들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계속 성장했다. 오늘날 보엠은 오터바인과 함께 연합감리교회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이 기사는 2024년 5월 22일 umc.org에 의해 제작되었다. 필립 J. 브룩스는 연합감리교회 공보부의 작가이자 콘텐츠 개발자이다. 이메일로 그에게 연락할 수 있다.


[1] 로우, 케네스 E.; 리치, 러셀 E.; 슈미트, 진 밀러. The Methodist Experience in America Volume I: A History. 내쉬빌: Abingdon Press, 2010.

[2] 이오비노, 조. “마틴 & 헨리 보엠: 연합감리교회의 창립을 도운 가족.”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6월 1일, 2018.

[3] “메노나이트의 관점에서 본 신앙고백.” 미국 메노나이트 교회(Mennonite Church USA).

[4] 로우, 케네스 E.; 리치, 러셀 E.; 슈미트, 진 밀러. The Methodist Experience in America Volume I: A History. 내쉬빌: Abingdon Press, 2010.

[5] 이오비노, 조. “마틴 & 헨리 보엠: 연합감리교회의 창립을 도운 가족.”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6월 1일, 2018.

[6] 같은 글.

[7] 같은 글.

[8]  블룸, 린다. “Mennonites reconnect with UMC founder.” 연합감리교뉴스. 6월 27일, 2016.

[9] 로우, 케네스 E.; 리치, 러셀 E.; 슈미트, 진 밀러. The Methodist Experience in America Volume I: A History. 내쉬빌: Abingdon Press, 2010.

[10] 이오비노, 조. “마틴 & 헨리 보엠: 연합감리교회의 창립을 도운 가족.”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6월 1일, 2018.

[11] 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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