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아침은 많은 이들에게 잠옷을 입은 채 느긋하게 쉬며 맛있는 음식을 먹고 찬찬히 선물을 여는 날을 의미한다. 하지만 미국의 감리교회를 시작한 이들에게 1784년 성탄 전야는 교회의 중요한 일을 논의하는 열흘 간의 대장정이 시작된 날이었다. 그들이 마침내 우리에게 남긴 선물은 후일 역사를 바꿔놓을 새로운 교단의 창설이었다.
모이기로 결의하다
토마스 코크가 델라웨어주 프레드리카의 베렛 채플에서의 예배 후 프랜시스 애즈베리를 만나 그에게 중요한 뉴스를 전해준다. 존 웨슬리가 자신을 보내 애즈베리를 안수하고 그를 미국의 새로운 감리교회의 감리사로 임명하라고 했다는 소식이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미국에서 섬기던 영국 국교회 사제들은 미국 독립 전쟁 중 영국으로 돌아갔고, 이 탓에 감리교인들에게 성례를 베풀 사제들이 미국에 남아 있지 않았다. 평신도 설교자들이 애찬과 모임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안수받은 목회자들이 필요한 실정이었다.
그러나 영국 국교회는 웨슬리가 발굴하고 훈련한 감리교 설교자들을 안수하여 대서양 건너로 보내달라는 그의 요청을 계속해서 거부했고, 웨슬리는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직접 두 명의 감리교 평신도 설교자들을 안수하여 미국으로 보내면서 코크를 총리사로 임명한 것이다.
베렛 채플에서의 예배가 열렸던 11월의 주일, 애즈베리와 코크는 미국 내에 있는 모든 감리교 설교자들을 모아 특별 총회를 소집하기로 했다. 1784년 12월 24일부터 러블리레인채플에서 만나 새로운 교을 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이 함께 보낸 열흘은 이후 성탄절 총회로 알려지게 된다.
총회 개최까지 불과 40일 앞이었고 그들은 즉시 그 소식을 알려야 했다. 베렛 채플 신도회의 지도자였던 프리본 개렛슨은 말을 타고 떠났다. 감리교인이었던 폴 리비어는 후일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내 사랑하는 주인께서 6주 만에 1,200마일을 이동할 수 있게 하셨다.”
필립 오터바인(왼쪽에서 두번째)은 프랜시스 애즈베리의 안수식에 참여한 이들 중 하나였다. 사진 제공: 교회역사보존위원회
초대 총회
개렛슨은 이 기념비적 작업에 매우 능했다. 코크에 의하면 81명이 러블리레인채플에 모였다. “그들 중 거의 60명”은 “미국 출신의 설교자”였으며 “대부분이 젊은이들이었다”라고 그는 적었다.
미감리교회(Methodist Episcopal Church) 설립을 위한 총회가 시작되었고, 코크, 리차드 왓코트, 토머스 베이시만 목회자였다(왓코트와 베이시는 몇 주 전 웨슬리가 안수한 이들이었다). 애즈베리를 비롯해 성탄절 총회에 모인 다른 이들은 모두 평신도 설교자였다. 그리고 코크는 이 문제를 곧 바로잡고자 했다.
프랜시스 애즈베리는 성탄절에 집사 목사 안수를 받고, 이튿날에는 장로 목사 안수를 받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총리사로 임명되었다. 결코 깨지지 않을 전무후무한 기록이었다.
이미 수년 동안 미국 감리교인들의 실질적 지도자로 섬겨온 그였지만, 애즈베리는 그저 웨슬리의 임명만으로 총리사직을 수락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 위치에서 섬길 수 있도록 다른 설교자들이 그를 선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성탄절 총회가 끝난 직후, 감리교인들은 코크와 애즈베리를 감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물론 웨슬리가 거부했던 표현이긴 하지만, 연합감리교회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감독을 선출한다.
애즈베리의 안수는 또 다른 일의 전조가 되었다. 애즈베리의 안수식에 참여했던 독일개혁교회(German Reformed Church) 목사 필립 오터바인이 후일 연합형제교회(United Brethren Church)의 설립을 도왔기 때문이다. 연합형제교회는 연합감리교회의 전신 교회 중 하나다.
성탄절 총회는 회의록을 남기지 않았지만, 역사가들은 참가자들이 남긴 일기 기록들과 총회가 채택한 장정(Discipline)을 통해 당시 일어난 일의 상당 부분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 12명의 평신도 설교자가 선택되어 장로 목사로 안수를 받았고, 존 웨슬리가 코크의 손에 들려 보낸 주일 예배(The Sunday Service)가 새 교단의 예배서로 승인되었다. 현재 연합감리교예배서(Book of Worship)의 전신이었다. 총회는 또한 콕스베리 칼리지(Cokesbury College)의 설립을 논했으며 새 교단 설립에 필요한 여러 다른 결정들을 내렸다.
총회의 종료와 함께 새 교단이 탄생했고, 애즈베리는 늘 그랬든 절제된 방식으로 이 과정에 대해 썼다. “총회는 일주일 내내 계속되었다. 자유롭게 토론하고 다수결에 의해 모든 일을 결정했다,” 그는 설명했다. “우리는 대단히 서둘렀고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일을 처리했다” (프랜시스 애즈베리의 일기 및 편지, 1784년 12월 18일, p. 939).
이는 분명 많은 이들이 성탄 휴가를 보내고자 하는 방식은 아니다. 하지만 신앙의 선구자들의 후예로서 그들이 이런 방식으로 그해 성탄 휴가를 보낸 것이 기쁘다.
조 이오비노는 연합감리교회 공보부의 교인 자료 담당 부서의 책임자입니다. 이메일을 보내 연락하세요.
이 이야기의 영문 기사는 2017년 12월 12일에 처음 게시되었습니다.